추모자료 성림당 월산 대종사



첫 제자 월산스님 필두 40여 ‘호랑이’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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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2 댓글 0건 조회 780회 작성일 18-05-28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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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월두 월천 등

월(月) 자 돌림 제자들

 

평생 ‘참선수행’ 강조

 

“불법(佛法)을 향하여

이 목숨을 크게 던져 봅시다.

죽음으로써 각오를 세울 때

무엇을 이루지 못하겠소”

 

지리산 칠불선원에서

기아 속에서도

‘죽어도 좋다’는

각서까지 받고 용맹정진

 

일제 강압 불구

끝내 창씨개명 안 해

  
금오선사는 1944년 도봉산 망월사에서 월산스님을 첫 제자로 맞이한 이래 40여명의 제자를 두었다. 늘 한결 같이 참선수행을 강조했으며 문하에 수많은 눈푸른 납자들이 나왔다. 사진은 월산스님 등 금오스님의 제자들.

직지사를 시작으로 선지식의 면모를 펼쳤던 선사는 해방 직전인 1944년 세속으로 48세가 되어 처음으로 제자를 맞이한다. 첫 제자가 바로 훗날 선지식 성림당 월산대종사다. 금오스님과 출가 전 월산스님, 즉 최종열(崔鍾烈)은 1943년 안변 석왕사에서 처음 인연을 맺는다. 만주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들린 석왕사에서 금오스님은 조실 환공스님(속명 양안광)으로부터 한 청년을 소개받는다. 소년 시기부터 형체와 문자 이전의 소식과 인간 본래 모습에 대해 질문을 많이 던졌다고 하는 청년은 부친 사망 후 석왕사를 찾아 금오스님과 인연을 맺었다.

<금오스님과 불교정화운동>에서는 금오스님과 월산스님의 첫 만남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집도 절도 가질 수 없으며, 처자와 자식을 가질 수 없으며, 재물도 권세도 가질 수 없으며, 그 저 빈손인 것이 수행자의 삶인데 그대는 이 길을 가겠는가?” 그래도 청년의 대답은 확고했다. 이에 금오선사는 청년을 향해 몇 마디 던졌다. “무슨 까닭으로 출가할 생각을 했는고?” “오래 전부터 출가 수행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출가수행자의 길이 편하고 좋은 것만은 아닐세. 형극의 길이라는 것을 짐작이나 하고 있는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하시게. 경솔하게 출가하면 후회만 하게 되느니…” “결코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스님 문하에서 수행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금오선사는 청년에게 석왕사를 떠나 함께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물었다. 두 사람은 서울 근처로 내려와 소요산 자재암에 닿는다. 이곳에서 한 달을 묵고 다시 남하한 곳이 도봉산 망월사였다. 금오선사는 청년과 함께 이곳에서 여장을 풀고 다시 정진에 들어갔다. 이때가 1944년 이었다. 함께 따라온 청년도 이곳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금오선사는 청년에게 월산(月山)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청년이 그날 밤 둥근달이 산 위에 떠있는 꿈을 꾸었다는 말을 듣자 법명에 달 월(月)자를 넣어 지었다.

첫 제자를 맞이한 선사는 제자에게 화두를 건네며 참선정진을 지도했다. “참다운 수행자란 첫째도 참선, 둘째도 참선이며, 셋째도 참선이다. 그러므로 오직 참선 수행을 으뜸으로 삼아야한다”고 가르쳤다. 금오선사가 금강산 마하연에서 도암스님에게 받았던 화두, ‘시심마(是甚麽)’를 내렸다. 월산스님은 화두를 받아 정진했다. 스승과 제자는 망월사에서 흥국사로 옮겼다. 월산스님은 이곳에서 공양주를 맡아 대중들을 시봉하며 용맹정진 했다. 선사는 월산스님에게 더 깊은 공부를 위해 수덕사로 갈 것을 제안했다. 수덕사는 ‘금오’라는 큰 산을 만든 덕숭의 본찰이었다. 그곳에는 만년의 만공스님이 납자들을 제접하고 있었다. 월산은 경허의 직계제자 만공선사 회상에서 한 철 나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것은 더 큰 산으로 우뚝 서도록 강하게 단련시킨 스승의 배려였을 것이다.

만공선사는 처음 만난 월산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네는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왜 중이 되었는가” 월산스님은 엉겁결에 대답했다. “스님은 왜 중이 되었소” 그러자 만공스님이 이렇게 말씀했다. “이 사람아 내가 중인가” 월산스님은 나중에 이 일화를 들려주며 대중들에게 물었다 “내가 대답을 잘했는가 못했는가?”

제자를 더 큰 길로 떠나보낸 스승 금오선사는 태백산 각화사 토굴로 향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1945년 해방 즈음 금오선사 나이도 어느덧 쉰의 노승(老僧) 반열에 들게 됐다. 당시 승려들은 대부분 창씨개명을 하며 종단 지도부는 친일 행렬에 앞장섰다. 사찰은 대처승 차지가 되어 왜색불교화 된지 오래고 몇몇 수좌들에 의해 겨우 부처님 고유의 청정 불교가 잇고 있을 정도로 계율은 땅에 떨어졌다. 그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선사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조선의 수좌로서 자존감과 명예를 지켰다.

그러나 수좌들의 어려운 사정은 해방이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일제시대 권승들은 여전히 토지와 종권은 물론 심지어 광대한 토지에서 나온 부를 바탕으로 쌓은 부와 학식을 바탕으로 정치권력까지 장악했다. 반면, 수좌들은 여전히 빈궁한 처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비구승들은 제 먹을 것을 탁발해서 조달하지 않으면 선원에 방부조차 드릴 수 없었다. 전도양양한 청년 수좌들은 유혹에 시달렸다. 장가를 가면 토지와 살 집을 제공한다는 유혹은 컸다. 이런 와중에도 1946년 가야산 해인사에는 효봉스님을 모시고 총림이 설치되었으며, 1948년 문경 봉암사에는 눈푸른 납자들이 모여 부처님법대로 살자는 결의를 세웠다. 그리고 한국불교의 성지 지리산에는 금오선사가 있었다.

1947년 금오선사는 지리산 쌍계사 조실로 주석하며 쌍계사와 칠불선원을 오가며 납자들을 제접했다. 대은율사가 조선의 선맥과 율맥을 전승하기 위해 서상기도 한 유서 깊은 암자이며 아자방으로 유명한 칠불선원에는 선객들이 즐겨 찾아들었다. 금오선사는 이곳에서 피나는 정진을 거듭했다. 그러나 수좌들의 삶은 비참했다. 말이 토굴이지 오랫동안 방치된 토굴은 폐가와 다름없었다. 결제를 3~4일 남겨두고 겨울 날 일이 걱정인 수좌들은 너나없이 걸망을 싸고 떠나려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실 금오선사는 이들을 막아선 뒤 이렇게 법문했다.

“이 아자방에서 대은율사는 기도 정진 중 서광을 얻어 우리나라 비구계단을 중흥시켰으며 수많은 기적과 보살화신들의 일화가 어느 절보다 많은 서기가 어린 도량이올시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흩어지지 말고 모두 동안거를 이 아자방에서 이루어 미진했던 공부를 한바탕 결단해 마칠 생각이 없소이까? 그런데 그대들은 어찌하여 한갓 배고픔으로 인해 이곳을 떠나려 하는가.” 선사의 단호한 결기에 수좌들도 마음을 바꾸었지만 매서운 지리산의 추위 속에 굶으면서 안거를 날 수는 없었다. 이에 선사는 동안거 중 반은 탁발행을 하고 반은 용맹정진하도록 했다. 수좌들이 탁발할 동안 선사는 산에서 땔나무를 해 장작을 팼다. 칠불선원에서 선사는 수좌들에게 ‘용맹정진 하다 죽어도 좋다’는 각서까지 받고 정진했다. 각서를 쓰지 않은 수좌는 칠불을 떠날 것을 명할 정도로 목숨을 걸었다. 선사는 이렇게 법문했다. “오늘날 우리 대중은 불법(佛法)을 향하여 이 목숨을 크게 던져 봅시다. 우리가 죽음으로써 각오를 세울 때 무엇을 이루지 못하겠소. 여러분이 죽어도 좋다는 각오만 선다면 나도 힘을 다하여 용맹정진을 앞서 끌고 나갈 것이오.” 그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한철을 지내 몇몇은 안목을 얻어 선사를 받들어 모셨으며, 업력이 깊어 정진에 많은 고초를 겪었던 학인들도 장부로 거듭났다. 이 모두 선지식의 법력이었다.

1948년 정국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광복의 기쁨은 가시고 곧 사라질 줄 알았던 38선에는 날마다 긴장감이 돌았다. 지리산은 긴장의 한 복판에 휩싸였다. 인근 여수 순천 반란 사건으로 쫓긴 무리들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빨치산 활동을 전개해 칠불선원까지 위험해졌다. 밤에는 빨치산이, 낮에는 경찰이 들이닥치는 위기가 날마다 계속됐다. 결국 수좌들의 건의에 따라 피난을 떠나게 됐다. 칠불선원을 내려오다 금오선사는 군용차량을 발견하여 손을 들어 세웠다. 치열한 전투 현장에 언제 어떤 이유로 죽을지 모르는 급박한 순간에 선사는 태연하게 군용차량을 세웠고 호방했던 지휘관이 흔쾌히 허락해 선사와 수좌들은 무사히 지리산을 빠져나왔다.

두 번째 제자, 그리고 선학원…

지리산을 나온 선사는 계룡산으로 갔다. 이곳에서 두 번째 제자를 맞이했으니 위기의 순간마다 종단을 구했던 탄성스님이었다. 그 때가 1950년이었다.

금오선사는 목포의 정혜원을 찾아갔다가 이곳에서 월산스님과 해후한다. 월산스님을 수덕사로 떠나보낸 지 5년만이었다. 월산스님은 몇 년 만에 은사를 모시고 완도에 갔다. 금오선사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며 물었다. “이 돌멩이가 과연 마음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대답을 못하자 선사는 돌멩이를 바다에 던지고 다시 물었다. 세 번이나 계속해서 물어도 대답을 못하자 이렇게 타일렀다. “선지를 넓히려면 오직 화두를 참구하는 일에 게으르지 마라.” 월산스님은 그날 이후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화두 참구에 매달려 정진했으며 금오선사가 열반에 들기 전 문도들을 모아놓고 오른손을 들었는데 월산스님은 그 때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한편 금오선사의 명성은 제방 선원에 널리 퍼져 제자가 되기 위해 많은 수좌들이 몰려들었다. 1951년에는 월남, 1953년에는 월두(혜정)스님을 제자로 맞아들였다. 다시 탄성스님의 소개로 월천(이두)스님을 제자로 받아들여 모두 4명의 제자가 생겼다. 선사는 제자들에게 오직 참선수행만을 강조했다. 이후 스님의 제자는 범행 월성 월주 월서 월만 월탄 정일 월조 월태 월담 월용 천룡 월복 혜덕 아월 묘각 삼덕 혜성 남월 등 40여명으로 늘어났다. 선사는 제자를 받아들이면 어김없이 참선수행을 할 화두를 내렸다. 길을 가다가 만나는 돌멩이 하나, 풀 한 잎, 구름 한 조각 바람 소리마저 화두로 내렸다고 한다.

금오선사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강원에 나가 경(經)을 읽거나 문자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강원에 나가면 크게 호통을 쳤다. 한번은 혜정스님이 금오스님에게 물었다. “큰스님은 어째서 경을 공부하거나 글공부 하는 것에 그토록 반대하십니까“ ”너는 어찌하여 그것을 모르느냐. 문자란 깨침이 아니라 하나의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자와 경에 얽매이면 쓸데없는 알음알이에 집착하게 되고 정작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직 화두 참선에만 매여야 견성성불 할 수 있는 법이다.”

1953년 5월 57세 때 금오선사는 선학원 조실을 맡게 된다. 6ㆍ25한국전쟁 휴전이 임박하던 때였다. 여기서 포산스님의 제자였던 범행스님을 만난다. 생전에 범행스님은 처음 본 금오스님을 “마치 중국의 달마대사 같은 얼굴을 하며 풍채가 당당하고 위엄이 서려있어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태산이 앉아있는 듯한 우람한 체구였는데 그에 비해 목소리는 한없이 너그럽고 부드러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범행스님은 금오스님을 수원의 팔달사 조실로 모셨다. 거리가 가까웠던 까닭에 스님은 선학원을 자주 왕래하게 된다. 이는 휴전 후 한국불교사를 변화시키는 인연으로 작용한다.

법주사ㆍ금오선수행연구원 이사장 월서스님·불교신문 공동기획

[불교신문3079호/2015년2월4일자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출처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9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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